성장 그리고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Glad to meet
you, can we collaborate?’
일본에 도착하고 한국에 관한 발표 그리고 연구 방향에 대한 첫 발표가 끝난 직후 받게
된 메일이었다. 대학원생 입장에서 학기 중에 교환학생을 가는 것은 상당히 큰 결정이었고, 그에 상응하는 기회비용을 놓치게 되어 아쉬웠고 아쉬운 만큼 연구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싶었다. 이에 한국에 대한 소개 및 자기소개를 해달라는 일본 지도교수님의 첫 요청사항에 한국 소개는 간결히 하고 주로
진척하고 싶은 연구 내용을 피피티에 채워넣어 첫 발표를 진행했었다. 그 이후, 해당 일본 연구실을 졸업하시고 국가 연구소에서 일하고 계신 박사님으로부터 발표가 상당히 흥미로웠고 일본에 있는
동안 내 주 연구분야인 Graph Neural Network에 대해 코웍을 하자는 메일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collaboration 은 시작되었고, 매주 Zoom 으로 미팅을 함과 동시에 일본 교수님에게도 이에 대한
프로그레스를 보고드리며 연구를 진척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매 번 디테일하게 연구지도를 해주시는
지도 교수님 덕분에 매 주 한 단계씩 나아가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시 처음부터 연구에 대한 방향성을 쌓아나갔어야 했고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연구 스타일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주로 코웍 메일을 주신 박사님과 연구를 진척해 나갔었는데,
뚜렷하고 디테일한 방향성을 제시해주시는 스타일이 아닌 나를 한 명의 동등한 연구자로 대해주셨고, 수평적으로
같이 디스커션을 하며 연구 방향성을 하나씩 설정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모든 가설과 실험 결과, 도표 등을 모두 영어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모국어가 아닌 만큼 많이
낯설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었다. 하지만 되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 확실하게 논리를 정돈하고 쉬운 용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나중에 논문을 작성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대화에서 나누었던 특정 용어, 문장들을
그대로 논문에 옮겨적으면 되었기에 훨씬 속도를 단축 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매 주 디스커션을 하고, 성과를 하나씩 만들어가다보니 목표했던 데이터 마이닝 분야 가장 권위적인 학회인 KDD 에 작업물을 제출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대학원생인
나로 하여금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앞으로의 연구 인생에서도 소중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일본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와 별 다른 바가 없었다. 대학원생의 특성 상,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고 밤을
새는 날도 적지 않았으며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 체력을 보충하기에 바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으러 숙소로 돌아가는 길, 주변
간판이 모두 일본어로 적혀있었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 나는 타지에서 연구를 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고,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라는 것을 재차 상기시켜주었다. 매
순간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트리거 역할을 했고, 더욱 이 기간을 의미있게 보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받는 순간이었다. 바쁜 일상이었지만, 틈틈히
점심 시간 미슐랭 돈카츠 식당에 가보기도 했고, 주말에는 시부야, 신주쿠에서
관광객 바이브로 쇼핑을 즐기기도 했고, 출국 전 마지막 주에는 카이스트 친구들과 삿포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시간들은 소중한 선물로 다가왔었고, 무채색이었던
내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종합하면, 나를 성장하게 만들어 준 일본에서의
코웍 경험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틈틈히 미식과 여행을 즐긴 시간들은 대학원 생활을 하며 잃어버린 낭만을 채울 수 있던 5개월로 압축되었던 것 같다. 수기를 쓰는 시점, 나는 여전히 대전 어느 익숙한 연구실 내 자리에 앉아 터미널에서 python
main.py 를 입력하며 실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5개월 전과는 다르다. 무언가 정의할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의 감정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 도착하여
신주쿠에서 처음 먹은 미소라멘의 깊은 감칠맛, 밤을 새고 미팅을 준비하고 성공적으로 끝낸 뒤 미슐랭
돈카츠 집에서 히레카츠를 처음 먹었을 때의 그 설렘, 실험결과가 엉망으로 나와 좌절하며 먹었던 숙소
근처 돈코츠 라멘,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분위기만 느끼고 온 일본 영화관에서의 슬램덩크, 삿포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클래식 삿포로와 함께 즐긴 생강 시오 라멘은 여전히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선물해 주신 KAIST Campus Asia, Tokyo
Tech Campus Asia, 일본 지도 교수님 및 연구원님, 그리고 한국 지도교수님에게
감사드리며 수기를 마무리하고 싶다.